‘마에스트로’ 그린스펀 별세(Alan Greenspan)…향년 100세, ‘AI 과열’ 논쟁 한복판에

‘마에스트로’ 그린스펀 별세(Alan Greenspan)…향년 100세, ‘AI 과열’ 논쟁 한복판에
앨런 그린스펀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 의장이 22일(현지시간) 향년 100세로 별세했다. 4대 대통령 아래 19년간 연준을 이끈 '마에스트로'의 죽음은, 그의 방식을 되살리려는 케빈 워시 신임 의장과 'AI 과열' 논쟁이 맞물린 시점에 찾아왔다.
앨런 그린스펀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이 22일(현지시간) 워싱턴DC 자택에서 별세했다. 향년 100세. 사인은 파킨슨병 합병증으로 전해졌다. 1987년부터 2006년까지 약 19년 동안 네 명의 대통령 아래 연준을 이끌며 ‘마에스트로’로 불린 인물이다. 부인인 앤드리아 미첼 NBC 기자가 별세 사실을 알렸다고 미 공영방송 PBS 등 외신이 보도했다.
연방준비제도는 미국의 중앙은행으로, 기준금리를 정해 물가와 경기를 조율하는 기관이다. 연준은 애도 성명에서 그린스펀의 리더십 아래 경제 성장을 뒷받침한 지속적인 물가 안정의 시대를 달성했다고 밝혔다.
‘검은 월요일’에서 닷컴 호황까지, 19년의 황금기
1926년 뉴욕에서 태어난 그린스펀은 경제 컨설팅 회사를 운영하고 제럴드 포드 행정부의 경제자문위원회(CEA) 의장을 지낸 뒤, 1987년 폴 볼커의 뒤를 이어 13대 연준 의장에 올랐다. 취임 두 달여 만인 그해 10월 19일, 다우존스 지수가 하루 만에 22.6% 폭락한 ‘블랙 먼데이’가 닥쳤지만 그는 신속한 유동성 공급으로 시장을 진정시켰다.
1990년대 후반 미국 경제는 고성장과 저물가가 공존하는 이례적 호황을 누렸다. 1980년대 중반부터 2007년까지 이어진 이 장기 안정기는 ‘대안정기(Great Moderation)’로 불린다. 그린스펀은 윌리엄 맥체스니 마틴 전 의장에 이어 둘째로 긴 재임 기록을 남겼고, 밥 우드워드가 2000년 펴낸 책 제목을 따라 ‘마에스트로(거장)’라는 별칭을 얻었다.
그는 금리 결정의 배경을 설명하는 성명을 처음 도입해 연준의 소통을 한층 투명하게 바꿨다는 평가를 받는다. 동시에 속내를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모호한 화법으로도 유명해, 시장이 그의 한마디를 해석하느라 분주했던 데서 ‘그린스펀어(Greenspeak)’라는 말까지 생겼다. 1996년에는 자산시장 거품을 우려하며 ‘비이성적 과열(irrational exuberance)’이라는 표현을 남겼는데, 이는 지금도 시장 과열을 경계하는 상징적 문구로 인용된다.
빛과 그림자, 2008년 금융위기와 뒤늦은 고백
명성은 퇴임 2년 만에 금이 갔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토대가 된 서브프라임(비우량) 주택담보대출 확산과 금융 규제 완화를 적절히 막지 못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그는 장외 파생상품 규제에 반대했고, 시장의 자율 조정 능력을 깊이 신뢰했다. 미국 금융위기조사위원회(FCIC)는 그가 주도한 30여 년간의 규제 완화가 재앙을 막을 수 있었던 핵심 안전장치를 걷어냈다고 결론지었다.
2008년 10월 의회 증언에서 그린스펀은 은행이 스스로를 규제할 것이라 본 자신의 가정이 잘못이었다고 인정했다. 그는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을 규정한다고 믿어온 자신의 모델에서 결함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훗날 그는 위기를 “100년에 한 번 올 법한 신용 쓰나미”로 표현했고, “전체적으로 내 판단의 70%는 옳았지만 30%는 잘못됐다”고 자평했다.
왜 지금 다시 그린스펀인가, 워시 신임 의장의 ‘회귀’
그의 별세는 공교롭게도 새 연준 수장이 ‘그린스펀 방식’을 되살리려는 시점과 겹쳤다. 지난달 취임한 케빈 워시 신임 의장은 취임식에서 역대 의장 가운데 유일하게 그린스펀을 직접 거명하며 경의를 표했다.
워시 의장은 17일 취임 후 첫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에서 기준금리를 동결하면서, 성명서 분량을 대폭 줄이고 향후 정책 방향을 미리 알리는 ‘포워드 가이던스’와 점도표 중심의 전망 공개를 사실상 거둬들였다. 결정의 배경을 좀처럼 설명하지 않던 그린스펀 시절로의 회귀라는 분석이 나온다. 특히 워시는 1996년 그린스펀이 경기 과열 신호에도 금리를 올리지 않은 선택을 즐겨 인용한다. 당시 그린스펀은 컴퓨터와 생산성 혁명이 경제 구조를 바꾸고 있다고 판단했는데, 워시는 지금의 인공지능(AI) 붐이 1990년대처럼 고성장과 저물가를 재현할 수 있다고 본다.
정치적 맥락도 깔려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금리 인하를 압박하며 제롬 파월 전 의장을 거듭 공격한 끝에 워시를 발탁했다고 뉴스위크 등이 전했다. 그린스펀 본인은 올해 초 벤 버냉키, 재닛 옐런 전 의장과 함께 연준의 독립성을 흔드는 시도를 우려하는 목소리를 낸 바 있다.
분석과 전망: ‘AI가 제2의 1990년대인가’
그린스펀의 유산을 둘러싼 평가는 그의 별세 이후 오히려 더 뜨거워졌다. 핵심 쟁점은 워시가 빌려온 ‘1996년의 베팅’이 AI 시대에도 통할 것인가다. 브라이언 웨스버리 퍼스트트러스트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워시의 소통 방식이 옛 그린스펀의 그것과 더 닮아 있다고 평가했다. 반면 매슈 루제티 도이체방크 수석 미국 이코노미스트는 워시의 변화가 2008~2009년 금융위기 이후 연준이 다져온 소통 관행에서 벗어난 큰 전환이라고 진단했다.
회의론도 만만치 않다. 뉴욕타임스는 24일 칼럼에서 워시가 그린스펀의 1996년 사례에서 성급하게 교훈을 끌어냈다고 지적했다. 그린스펀은 결론을 서두르지 않고 데이터를 깊이 파고든 뒤에야 움직였다는 것이다. 다수 이코노미스트도 AI가 1990년대 호황을 그대로 되풀이할지에는 회의적인 시각을 보인다.
종합하면 관건은 두 가지로 모인다. AI 투자가 실제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질지, 그리고 연준이 말을 아끼는 사이 시장이 스스로 방향을 읽어낼 수 있을지다. 뉴스위크는 올바른 의장 한 사람이 물가와 시장, 정치를 원하는 대로 구부릴 수 있다는 믿음 자체가 위험하다고 짚었다. 2008년의 교훈이 바로 그것이라는 해석이다. 결국 그린스펀이 누린 영광과 추락이 동시에 보여준 것은, 한 사람의 직관에 기댄 통화정책이 얼마나 강력하면서도 취약한가라는 점으로 풀이된다.
한인 가계에도 남의 일은 아니다. 연준이 시장 안내를 줄이면 금리 향방을 둘러싼 불확실성이 커질 수 있다. 모기지(주택담보대출) 금리와 예금 금리가 그동안 연준의 신호에 따라 출렁여온 만큼, 소통 방식의 변화가 대출과 저축 결정에 미칠 파장도 지켜볼 대목이다.
앞으로 일정
워시 체제의 두 번째 FOMC 회의와 하반기 금리 경로, 그리고 AI 기업들의 실적 발표가 ‘AI는 제2의 1990년대인가’라는 논쟁의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그린스펀이 남긴 ‘비이성적 과열’이라는 경구가 30년 만에 다시 시장의 시험대에 오른 셈이다.
자주 묻는 질문
Q. 앨런 그린스펀은 누구인가.
1987년부터 2006년까지 약 19년간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 의장을 지낸 경제학자다. 네 명의 대통령 아래 통화정책을 이끌며 ‘마에스트로’로 불렸고, 22일(현지시간) 향년 100세로 별세했다.
Q. 왜 ‘빛과 그림자’라는 평가를 받나.
1990년대 장기 호황을 이끌었다는 찬사와 함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부른 규제 완화의 책임자라는 비판을 동시에 받기 때문이다. 그 자신도 2008년 의회에서 판단의 일부가 잘못됐다고 인정했다.
Q. 그의 별세가 지금 다시 주목받는 이유는.
케빈 워시 신임 연준 의장이 그린스펀식 ‘말 아끼는 연준’과 1996년의 금리 판단을 AI 시대에 되살리려는 시점과 겹쳤기 때문이다.
출처: PBS 뉴스아워, 뉴스위크, 이투데이, AP, 미 연방준비제도 보도자료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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