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은 언제 생겨났나 — 인종은 혈통이 아니라 만들어진 개념이라는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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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은 언제 생겨났나 — 인종은 혈통이 아니라 만들어진 개념이라는 역사

‘백인(白人)’이라는 말은 마치 오래전부터 존재해 온 하나의 혈통·계보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역사와 과학을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인종’은 생물학적 실체라기보다 사회가 만들어 낸 범주이고, &#82…

‘백인(白人)’이라는 말은 마치 오래전부터 존재해 온 하나의 혈통·계보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역사와 과학을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인종’은 생물학적 실체라기보다 사회가 만들어 낸 범주이고, ‘백인’이라는 범주 역시 특정 시대에 만들어져 계속 경계가 바뀌어 온 개념입니다. 오늘은 ‘백인’이라는 관념이 언제, 왜 생겨나 어떻게 변해 왔는지 — 그 ‘개념의 계보’를 따라가 봅니다. 미국에 사는 이민자에게는 특히 곱씹어 볼 만한 이야기예요.

이 글의 요지 — ① ‘인종’은 생물학적으로 뚜렷이 나뉘지 않는다(현대 유전학의 정설). ② ‘백인’은 근대(17~18세기) 식민주의·노예제 속에서 만들어진 범주다. ③ 누가 ‘백인’인가의 경계는 시대에 따라 계속 바뀌었다(미국에서 아일랜드·이탈리아계 등이 나중에 ‘백인’에 편입). ④ 인종은 생물학적 근거가 없어도 사회적으로는 실재하는 힘을 갖는다.

‘인종 이전’ — 사람들은 무엇으로 나뉘었나

피부색으로 사람을 ‘인종’으로 분류하는 사고방식은 생각보다 최근의 것입니다. 근대 이전 사람들은 주로 종교(기독교인·이교도), 지역·왕국, 언어, 신분으로 자신과 타인을 구분했어요. ‘유럽인=백인’이라는 통합된 정체성도 원래 없었습니다. 아일랜드인·잉글랜드인·이탈리아인은 서로를 다른 민족으로 여겼고, ‘같은 백인’이라는 묶음은 존재하지 않았죠.

‘백인’의 탄생 — 식민지와 노예제 속에서

‘백인’이라는 법적·사회적 범주17세기 대서양 노예제와 식민지 아메리카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초기 식민지에서는 유럽 출신 계약 하인(indentured servant)과 아프리카 출신 노예가 함께 고된 노동을 했습니다. 많은 역사학자는 이들이 함께 저항한 사건(대표적으로 1676년 버지니아의 봉기)을 하나의 전환점으로 봅니다. 이후 지배층이 노동자들을 피부색으로 갈라놓는 법을 정비해 갔다는 해석이 널리 받아들여지는데, 유럽계에게는 ‘백인’이라는 지위와 약간의 특권을 주고 아프리카계는 세습 노예로 묶는 식이었습니다. 즉 ‘백인’은 지배를 위해 사람을 나누는 도구로 제도화된 셈입니다.

‘과학’의 이름으로 — 그리고 무너진 근거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학자들은 인류를 몇 개의 ‘인종’으로 분류하려 했습니다. 독일 학자 블루멘바흐(Blumenbach)는 18세기 말 인류를 코카시안·몽골리안·에티오피안·말레이·아메리칸 다섯으로 나누고, ‘백인’에 ‘코카시안(Caucasian)’이라는 이름을 붙였어요. 그런데 이 분류는 객관적 과학이 아니라 당시의 미적·문화적 편견이 반영된 것이었습니다. 이후 19세기에는 두개골 측정, 우생학 같은 ‘과학적 인종주의’가 노예제·식민 지배·차별을 정당화하는 데 동원됐지만, 오늘날 이 이론들은 모두 근거 없는 것으로 폐기됐습니다.

현대 유전학의 결론은 분명합니다. 인류의 유전적 다양성은 ‘인종’ 경계와 깔끔하게 맞아떨어지지 않으며, 인류의 유전적 변이는 대부분 같은 집단 ‘내부’에 있고 서로 다른 집단 ‘사이’의 차이는 그보다 작다는 것이 일반적 발견입니다. 생물학적으로 뚜렷이 구분되는 ‘순수한 인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에요.

‘백인’의 경계는 계속 움직였다

‘백인’이 고정된 계보가 아니라는 가장 분명한 증거는, 누구를 백인으로 볼 것인가가 시대마다 달라졌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미국 이민사가 이를 잘 보여줘요.

  • ‘백인이 된’ 이민자들: 19세기 중반 대거 건너온 아일랜드계, 그리고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이탈리아·그리스·슬라브·유대계는 처음엔 ‘진짜 백인’으로 온전히 대접받지 못하고 차별을 겪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이들이 ‘백인’ 범주 안으로 편입된 과정을, 학자들은 ‘백인 되기(becoming white)’라고 부릅니다(노엘 이그나티예프 『How the Irish Became White』 등).
  • 법이 정한 ‘백인’: 미국의 1790년 귀화법은 시민권을 ‘자유로운 백인(free white persons)’으로 제한했습니다. 그래서 20세기 초 법정에서는 “누가 백인인가”를 두고 다툼이 벌어졌어요.
  • 모순을 드러낸 두 판례: 오자와 사건(1922)에서 대법원은 일본계 오자와에게 “백인은 곧 코카시안인데 너는 아시아계라 백인이 아니다”라며 시민권을 거부했습니다. 그런데 이듬해 싱드 사건(1923)에서는, 학문상 ‘코카시안’으로 분류되던 인도계 싱드에게 “과학적으로 코카시안이라도 보통 사람이 보기에 백인이 아니다“라며 역시 거부했어요. 두 판결을 나란히 놓으면, ‘백인’은 과학이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의 통념이 정한 것임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한인·아시아계에게 이 이야기가 뜻하는 것

이 역사는 한인을 포함한 아시아계 미국인에게 남의 일이 아닙니다. 앞의 오자와 사건이 보여주듯, ‘인종’ 범주는 종종 아시아계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그어졌고, 그 선은 정치와 통념에 따라 움직였어요. ‘백인’이 만들어진 범주라는 사실을 이해하면, 우리가 어디에 놓여 왔고 그 분류가 왜 절대적 진리가 아닌지도 함께 보입니다. 인종을 고정된 혈통이 아니라 사회가 그어 온 선으로 볼 때, 서로 다른 배경의 이웃을 이해하는 시야도 넓어집니다.

인디애나에서는 — ‘넷 중 셋이 백인’인 주

이 이야기는 우리가 사는 인디애나에서 더 구체적으로 다가옵니다. 인디애나는 미국에서도 백인 비율이 높은 주에 속해요. 2020년 센서스 기준 인디애나 인구의 약 75%가 백인이고, 흑인 약 9%·히스패닉 약 9%인 반면 아시아계는 약 2.6%에 그칩니다. 한인을 포함한 아시아계는 이 지역에서 뚜렷한 소수자인 셈이에요.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그 ‘백인 다수’라는 경계마저 움직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디애나의 백인 비율은 2010년 81.5%에서 2020년 75.5%로 10년 새 눈에 띄게 낮아졌어요. 이민과 다양성이 늘며 인구 구성이 바뀌고 있다는 뜻입니다. 즉 ‘백인이 다수’라는 사실은 이 지역 생활에 실제로 영향을 주는 사회적 현실인 동시에, 그 경계 또한 고정된 것이 아니라 계속 변한다는 것을 우리 주(州)의 통계가 그대로 보여주는 셈이죠. 이 글의 앞선 이야기는 먼 옛날·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인디애나에서도 이어지는 현재진행형인 것입니다.

그래도 인종은 ‘실재’한다 — 다른 의미로

오해하지 말아야 할 점 하나. “인종은 생물학적 실체가 아니다”라는 말이 “인종 차별도 없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인종은 생물학적 근거가 없어도, 사람들의 삶에 실제로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사실로 작동해 왔어요. 만들어진 범주라 해도 그것이 낳은 차별·불평등·경험은 실재합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인종을 ‘사회적으로 구성되었지만 결과가 실재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마무리

‘백인’은 오래된 혈통이 아니라, 근대에 만들어져 지금도 경계가 흔들리는 개념입니다. 계보를 따라가 보면 그 끝에 있는 것은 ‘순수한 인종’이 아니라, 특정 시대의 권력과 통념이 그어 온 선이에요. 이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인종을 둘러싼 많은 편견을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볼 수 있습니다.

※ 본 글은 역사·사회과학 분야의 일반적 학술 견해를 교양 차원에서 쉽게 정리한 것으로, 특정 집단을 폄하하거나 옹호하려는 의도가 없습니다. 세부 해석은 학자·자료마다 다를 수 있으며, 더 깊은 내용은 아래 자료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참고 자료

  • Noel Ignatiev, How the Irish Became White (1995)
  • Matthew Frye Jacobson, Whiteness of a Different Color (1998)
  • Ian Haney López, White by Law: The Legal Construction of Race (오자와·싱드 등 ‘귀화 전제 판례’ 분석)
  • 미국 대법원 판례 — Ozawa v. United States(1922) · United States v. Thind(1923)
  • 인종의 생물학적 실체 부재에 관한 유전학·인류학계의 합의(미국 인류학회 등 학회 성명 참조)
  • 미국 센서스국(U.S. Census Bureau) — 인디애나 인구·인종 통계(2020년 센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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